ETC

학기가 끝났다 - 뭘해야 할까
"A는 잘하는 걸 좋아하고 너는 '마무리'를 잘 하는 것을 좋아한다".
저번달, 교수님께서 후배 A와 나를 비교하면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나는 여전히 단거리 스플린터의 기질을 버리지 못해서, 진득허니 뭘 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가 애매한 연구자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이 글을 적어내려가는 시간이 20년 7월 7일 오후 3시 33분... 이 시간대가 참 애매한 것처럼.

1. "마무리를 잘 하는 건 중요하다"고 여전히 믿는다.

해외 유명한 교수들의 CV를 찾아봐도 가끔 제 위치를 찾지 못해 영원히 Working Paper로 남아버린 연구들이 있다. 세상의 빛을 받지 못 한 그런 연구들
나중에라도 펼쳐볼 거 같지만, 사실 이런 연구들은 교수가 유명하고 잘 나갈 수록 다시 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끊임없이 더 좋은 연구 기회가 찾아오니까. 바쁘고 강의를 하고 제자들과 새로운 연구를 하다보면 다시 그 작업물을 쳐다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작업물들을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당한 지점에서 멈추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넘어가기 전에 나는 항상 아깝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잘 정리해서 공모전에 냈다.
나는 지난 노력들이 언제나 보상을 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내 텀페이퍼가 어딘가에 쳐박히기 보다는 작은 보상이라도 돌려주길 바랐다.
공모전에서 상금을 받아서, 사진을 찍어서 자랑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나는 더 멀리 나아갈 힘을 충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앞으로 3개의 공모전 수상을, 후배들의 앞으로 3개의 공모전 수상을 챙겨주었다.

이 글은 꼭 공모전에 나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논문의 경우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난 나의 연구들이 티어가 낮은 저널에라도 실려서 다른 이들에게 읽히길 바랐다.
인용이 되었는지 여부를 꾸준히 눈여겨보는 건 단순히 내가 초짜 연구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정말 사랑한 연구들이었으니까. 나 말고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길 바랐던 것일뿐.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는 비용이 든다.

저런 자잘자잘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조차, 비용이 든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니까.
종강 후, 공모전의 경우에는 피피티라던가 보고서를 양식에 맡게 새로 만들어 다듬어야 했다.
심사위원의 눈에 들기 위해 포지셔닝을 바꾸기도 했고, 키워드를 재설정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귀찮아하면 절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으니까 참 열심히도 했다.

티어가 낮은 논문에 내기 위해서 리뷰과정을 돌리는 것이 품이 상당히 드는 일이고, 리뷰어가 지적한 관심 없는 선행 연구들을 살펴보며 짜증이 몰려올 수도 있다.
이런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게 꼭 좋은 시그널은 아니라서, 박사를 지원할 때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충고를 국내외 교수님(외국인/한국인)들에게 많이 듣기도 했다.

"넌 이 모든걸 언제 다하니 대단하다"라는 지도교수의 말씀은 칭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채근이기도 했을터인데, 나는 듣고 싶은 대로만 들었다.
그 시간에 좀 더 깊은 고민을 해서 마무리 짓지 않고 더 발전시키려고 했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A처럼 잘하는 걸 좋아하는 학생이었다면 논문의 편 수는 조금 적었을지언정, 더 좋은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었을까?

작년 겨울 내가 적었던 글을 가져와본다.

“기회가 오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두려워하라”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은 행사였다.
왜 유독 기억에 남았나 생각해보니 나의 2019년을 설명하는 한 줄 문장이더라. 이렇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 해도 드물텐데 결국 ‘준비’를 매듭짓지 못 하고 말았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완수 할 수 있으리라 자만했고, 나에겐 25시간이라도 주어진 듯 까불었지만, 나는 평범했고 그럼에도 많이 나태했다.
많은 성취를 이룬 해였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결과는 얻지 못 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기 때문에, 마무리를 짓기 위한 ROI또한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그게 참 어렵다.

3. 하지만 이 글을 읽는 후배 '너'는 한번 매듭을 지어봤으면 한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대단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자질이.. 우리 대부분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방학 때 뭔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한 학기 동안 고민 했던 내용들을 한번 돌아보기를 권한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그대가 뚝심있는 성격이 아니라면, 나같은 단거리 스플린터에, 외부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한다면, 결과물을 부디 만들어 보길 거듭 추천한다.
대학원에서 와서 우리가 좌절하는 이유는, 교수가 너무 똑똑하고 선배들이 너무 대단해보이고, 잘나가는 동기들을 보며 조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부만 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과를 가져온다. SNS로 이 세상 밖을 쳐다보면, 다른 친구들은 나빼고 다 행복해보이더라.

그래서, 꼭 한번은 완성을 해봤으면 한다.
그것이 공모전이라도 국문이라도 티어가 낮은 논문이더라도...
내가 이만큼 성장했다는 결과물을 받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완성한다고 해서 결과물이 보상처럼 돌아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잔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니, 그런 결과물까지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하고...



그런 때가 온다면 부디 이 글이 생각나기를...
"오늘 NDC 강연을 들으면서 기억에 남는 말: 4살 아들이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 Fail이 뜨자 좋아하더라. 그래서 Fail이 무슨 뜻인지 묻자 "실패"라고 대답하더라. 그래서 실패가 무어냐고 묻자 아들이 "다시 하라는 거야"라고 했다고"